춘천 한마음교회 부활신앙의 실체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신 그 공간과 시간 속 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체험하여 왔다. 교회의 전통과 신조는 그렇게 형 성되어 온 것이다.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프로테 스탄트(개신교)라는 말은 바로 1517년 10월 31일 오늘날 독일 동부에 있 는 작은 마을 비텐베르크의 성(城) 예배당 작은 문에 마르틴 루터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에서 촉발된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인 데서 시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10월 마지막 주 이 종교개혁 499년 기념주일을 앞두고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는 <김성로 목사, 부활교 사상 비판>이라는 신학 세미나가 있었다. 마르틴 루터 이후 종교 개혁자들이 지키고자했던 “십자가 신앙”을 중심으로 “부활 복음”에는 어 떠한 문제점이 있는 지 살펴보았다.

1. 미숙한 신학의 참사-바른신학의 중요성

포도원을 허는 미숙한 신학

교회는 시작부터 늘 자신을 살피고 정통 기독교와 다른 주장과 미혹에 대해 바른 믿음을 수호하기 위한 끝없는 신앙의 길을 걸어왔다. 그 다른 믿음에 대항하는 대척의 중심에는 늘 하나님의 신학자들이 있었다. 바른 신학에 대응하는 신학에는 미숙한 신학과 나쁜 신학이 있다. 이단과 사 이비들이 따르는 나쁜 신학도 문제이나 미숙한 신학도 그에 못지않게 교 회 공동체에는 대단히 위험하다. 나쁜 신학은 지상에 노출되나 미숙한 신학은 잠재적 큰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 저호가 발사 73초 만에 공중 폭파하여 승무원 7명이 먼지로 산화하였던 충격적 사건이 있었다. 당대 최고 과학자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자신 만만한 왕복선의 폭발 원인은 놀랍게도 수백만 부품 가운데 겨우(?) 탄 력을 잃은 불량한(미숙한) 고무 링(O-ring)이 문제였다. 신앙과 신학도 마찬가지다. 선무당이 사람 잡듯 미숙한 신학이 가져오는 신앙적 참사 는 챌린저호와 유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교회의 지도자들은 명심 할 필요가 있다. 참 신학은 인간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다. 참 신학은 하 나님이 주신 무한한 지혜(Theologia est infinita sapientia)임을 명심해 야 한다. 따라서 참 신학을 제대로 배운 목사라면 스스로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가 되서는 절대 안 된다.

미숙한 신학의 참사 그동안 김성로목사에 대해 일부 호감을 가진 기독교이단대책협회(기이 협)가 “많은 자료를 검토한 바, 신학적 착각에서 비롯된 내용과 잘못된 용어적인 표현과 시정해야 할 부분과 오해의 소지를 가진 부분들이 발 견되어 그것에 대한 제언을 드린다”고 공문에서 표현했듯 김성로 목사의 설교와 글에서 미숙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기이협 스스로 일정부분 인정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바른믿음> 사이트를 통해 정이 철, 림헌원, 이창모, 김대운 목사 그리고 권동우 대표 등의 최근 글들을 통해 볼 때 김성로 목사는 여전히 그 미숙한 주장들을 수정하지 않고 있 다고 보여 진다. 미숙함이 나쁜 신학보다 더 악영향을 줄 수 있음을 분명 히 기억해야 한다. 초대 교회 교부 아타나시우스(297-373)가 아리우스(250경-336경)와 벌인 그리스도의 신성과 본질에 대한 치열한 논쟁도 겨우(?) 헬라어 '이오타'(ι) 하나로 구분되는 교리적 차이 때문이었음을 기억하라. 이것이 왜 정통교회가 여호와의 증인이나 유니테리언, 자신이 재림 예수임을 외치는 모든 사이비종교들과 다른 지를 구분 짓고 있는 것이다.

2. 의인인 동시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인 인간의 취약성 - 부활 아닌 오직 십자가가 살린다!

부활 구호가 절대로 인류를 살리지 못한다

인간은 대단히 취약한 존재다. 무죄한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 추방당하 고 영원한 우주적 붕괴를 초래한 것은 겨우(?)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의 먹거리 언약을 지키지 못한데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부활 구호가 인간을 살리는 게 아니다. 인간은 단순히 주문처 럼 부활복음을 외친다고 변화되는 그런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의인인 동 시에 여전히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인 인간은 목사든 성인이든 누구든지 죄악에 노출된 취약한 존재에 불과하다. 부활 구호와 미숙한 간증에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한다. 부활 구호로 변화되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지며 인간은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끊 임없이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으로 양육 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다.

부활 구원론의 신학적인 치명적 문제, 유아구원 문제

성경은 부활을 외치지 않아도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부활할 것임을 말한다. 문제는 유아들이다. 김성로 목사의 주장대로 부활 믿음이 '하나 님의 승부수'라면 부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유아들은 도대체 어떻게 구 원 받는다는 말인가? 부활의 믿음이 없었으니 낭패가 아닌가? 부활이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말조차 할 줄 모르는 유아들은 부활의 믿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Sola Gratia)로 구원 받는 것이다.

십자가가 살린다!

개신교의 종교개혁신학이 '하나님의 의'를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 아닌 사람 보기에 미련한 '십자가의 지혜'(Sapientia crucis) 에서 찾으려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악과 시련과 핍박과 심지어 죽음 조차 기꺼이 감당하려는 진정한 용기와 소망은 부활에서 오는 게 아니 다. 참된 하나님 인식은 인간이 보기에 무기력하고 미련한 십자가에 있 다는 “십자가 신학”에서 오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와 칼빈의 종 교개혁 신학이 고수해 온 참 신학이요 바른 신학이다. 성도는 부활이 아 닌 십자가 지신 그 피 묻은 그리스도의 손을 굳게 잡고 천국으로 가는 것 이다. 부활이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담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인류의 무기력함과 비참함을 보라! 그리고 그 십자가에 동산 작은 먹거리 언약에도 넘어져버리는 비참한 모든 인류와 우주를 구원하시는 강력한 역설이 숨겨져 있음을 보라!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진노 아래 숨 겨져 있는 하나님의 역설적 사랑 속에 눈물을 쏟고 감격하는 것이다.

3. 십자가를 냉소적으로 조롱하며 얻는 '부활복음' 신앙(?)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그리스도로 마치는 고린도전서

하나님은 십자가의 미련한 것으로 복음 전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런데 김성로 목사는 “유튜브 설교”에 보면 빈번하게 “쓸데없이 십자가를 이야 기한다.”는 용어를 사용하여 십자가를 냉소적으로 취급하며 부활 신앙 을 강조한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고했다. 놀랍게도 부활의 장인 고린도전서 15장조차 실은 부활이 중심은 아니다. 오히려 교만하고 은사를 자랑하고 사두개인을 제외하면 유대인 들도 믿고 있던 부활에 대한 확신조차 없는 미숙한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향해 <부활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장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 이었다(고전 1:24). 죄악이 만연하고 미숙한 고린도교인들에게 사도 바 울은 부활의 장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해 그리스도로 시작하여(1-4절 참 조)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57절 참조)로 인도한다. 뿐만 아니라 고린도 전서 전체도 부활이 아닌 그리스도(고전 1:1)로 시작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고전 16:23-24)로 끝나는 책임을 기억하라!

부활의 심판대 앞에 무엇을 의지하고 설 것인가?

부활 구호? 그리스도의 피!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단어가 아니다. 모든 인류는 그 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무엇을, 누구를 의 지할 것인가? 그때도 사람들은 부활을 의지하겠는가? 부활을 소망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은 복 된 소망이다. 하 지만 십자가를 우롱하듯이 냉소적으로 대하면서까지 부활을 강조하면 안 된다. 인간은 신앙의 유무를 떠나 누구나 부활하여 그리스도의 심판 대 앞에 서게 될 존재일 뿐이다. 그때 우리들은 십자가가 아니면 무엇을 의지할 것인가! 굳이 부활을 강조하려면 오히려 복음, 하나님 나라, 소 망, 복 된 소망, 영원한 소망, 부활의 산 소망, 영원한 생명, 영원한 하나 님 나라의 복음과 같은 더 복되고 포괄적인 용어가 얼마나 많은가.

“십자가”를 넘어 “부활속죄론”, “부활칭의론”이 의심되는 주장

부활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넘어 무리하게 그리스도의 이중제사론까지 나아간다면 단번에 드리신(히 9:26; 10:10)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심각하게 모독하는 아주 위험한 신 학이 됨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한결같이 지키 고자 했던 종교개혁 신앙이 아닌 “부활하셔서 다시 제사를 드린다.”는 일명 '부활속죄론'(침례신문 2013. 2. 24일자 참조)이나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라 부활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일명 '부활칭의론'까지 나아가는 다른 기독교인 것이다.

4. <낯선 신학용어>의 분별없는 사용(일명 '이중제사'(?), '부활복음'(?), '하나님의 피',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은 반드시 신학적 평가를 받 아야 한다.

부적절한 용어 사용

김성로 목사는 스스로 기이협의 제언에 대해 자신이 투박한 표현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피'라는 용어 사 용은 '성부의 십자가'나 '성부의 부활', '성자의 열매', '성령의 피', '성령의 로고스'처럼 아주 낯설고 이상한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다. 김성로 목사 는 삼위일체의 전유(專有, appropriation) 개념을 잘 이해 못하는 듯하 다.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도 적절한 말은 아니다. 승부수라는 용어는 운동 경기에서 힘이 달리는 선수가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여 간신히 힘들 게 승리했다는 뉘앙스가 풍긴다. 이런 내재적 용어는 초월하시고 전지전 능하신 하나님께 적용하는 말이 아니다. 누가 '하나님의 승부수 십자가' 라는 말을 쓰는가? 이런 용어는 제 3계명을 침해할 수 있는 부적절하고 위험한 말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사용을 금해야 한다. 더구나 '이중제 사', '부활복음' 등의 문제가 현재까지 끊임없이 거론되는 것은 이 문제가 여전히 정리되지 않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신학용어의 사용 문제

교회가 신앙 선배들이 이룩한 신조와 교리를 존중하는 것은 교회의 역 사를 선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로운 신학적 용어를 사용할 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낯선 신학 적 단어를 빈번히 사용할 때 그 용어는 반드시 신학적 평가를 받아야 하 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최근 미숙한 낯선 신학적 용어의 범람으로 심각 한 교회적 파행과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교회는 성경과 더불어 역사 속 에서 새로운 신학적 용어에 대해 치열한 논쟁과 토의를 거쳐 성령의 인도 하심 속에 바른 교리를 구성하여 왔다. 비록 과학과 기술의 발달 속에서 다양한 단어들이 탄생하였더라도 이것들을 새로운 신학적, 교리적 용어 로 활용하는 것은 극히 조심해야 한다. 마리아의 염색체, DNA, 예수의 염색체 숫자-DNA, 마리아의 월경, 하늘 언어, 신사도, 빈야드 운동, 구 도자 중심의 열린 예배(열린교회가 아님), 한민족 제 2 선민론, 제 2 히브 리민족, 그리스도의 부활 후 또 다른 제사(일명 이중제사), 부활복음, 금 가루현상, '신천지'의 제멋대로의 성경알레고리해석 등과 같은 내재적이 고 성경적으로 낯선 단어들이 미숙한 신학이나 신비주의와 결합할 때 그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닌 불순한 폭발력을 가지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신학 전개에 있어 이 같은 교회사 속의 낯선 용어의 사용은 성령의 사람 들 가운데 치열한 신학적 논증 속에 달궈져서 그 진위(眞僞)를 평가 받은 다음 정금같이 나와야 하는 것이다.

5. 열심보다 중요한 <바른 믿음>

부흥이 전부는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말처럼 마귀도 선한 부흥에 (미숙한 신학을 동원하여) 맞불을 놓는다. 작금의 일부 한국교회가 그렇 다. 한국교회는 낯선 신학, 이상한 신학으로 양적 성장을 한 낯선 교회 들의 도전 앞에 바른 신앙을 수호해야할 과제를 안고 있다. 김성로 목사도 자신이 스스로 건전한 교단 소속 목사임을 늘 표명하고 있기에 끊임 없이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자신의 신학적 문제에 대해 특정 단체(기이 협)가 아닌 한국교회 앞에 문제된 부분에 대한 솔직하고 진지한 해명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나님은 살리는 영이시다. 그리고 목사는 부흥이 아 니라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하는 사람이다. 이제 미숙한 신학을 계속 고집 하지 말고 바른 길로 들어서는 것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일 것이다.

김성로 목사에게 드리는 마지막 권면은 이것이다. 김성로 목사가 좋아 하는 히브리서는 부활복음이 아니라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 게 하려고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으니 그런즉 우리도 “그 능욕을 지 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라”(히 13:13)고 한다. 그리고 '단번에 드리 신 피 묻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부활의 “산 소망”은 결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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