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하나님에 대한 고의적 무지를 갖는 세대의 풍 (1)

I. 서론: 동성애 수용 흐름의 지구촌 문화

미국의 퓨 센터(Pew Research Center)는 2014년 조사에서 한국 사 람의 39%가 동성애는 도덕적으로 문제될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동성 애 수용 여론이 가장 급속히 높아지는 나라라고 분석했다.1) 20대는 사 회가 동성애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71%, 30-40대는 48% 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세계 성소수자들의 협회인 ILGA(the International Lesbian, Gay, Bisexual, Trans and Intersex Association)는 2015년 현재 한국은 동성결혼을 인정하기 직전 단계에 있으며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우호적으로 변하고 있는 나라라고 발표했는데 이는 과장이 아닌 듯하다.2)

1960년대 서구 사회에서 일어난 성혁명의 물결은 서구 사회에 동성애 에 대해서도 전향적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어 주었다. 사회학자 기든스 (Anthony Giddens) 교수는 이 시대의 성에 대한 변화의 큰 흐름은 '여 성의 성적 자율성의 확대'와 '남녀 동성애 허용'의 방향이었다고 분석한바 있다.3) 동성애자들은 1969년 6월 28일에 미국 뉴욕 시의 스톤웰 인 (Stonewell Inn) 술집에 모여 결집한 이후 그 이듬해부터 거리로 나와 줄기차게 자신의 성적 결정권과 자유를 외쳐왔다. 그로부터 약 반세기가 지난 현재 서구사회에서 동성애는 법적으로 이성애와 나란히 다른 성애 의 한 형태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으며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서는 초중고 교과서에 동성끼리의 성애와 방법까지 서술하고 가르치는 현실이 되어 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회는 동성애를 성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에 반하는 죄악으로 가르쳐 왔었으나 지난 20여 년 동안 서구의 주류 개 신교단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이 입장을 철회하면서 동성애를 수용하는 문화적 흐름에 따라가게 되었다. 신자들이 500만 명이 되는 미국 루터교 회(ELCA)는 2009년 동성애자들도 목사가 될 수 있도록 장애가 되는 내 용이 있는 교회법을 개정했고, 뒤이어 약 200만 명의 신자를 지닌 미국 장로교회(PCUSA)가 마침내 동성애자들에게도 성직을 포함한 교회 직 분의 문을 열었다. 복음주의 교회는 아직은 동성애를 허용하고 있지 않 지만, 현재 소속 청년들의 44%가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복음주의 교회도 곧 이 문제로 몸살 을 앓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교회도 이런 전철을 밟게 될 것이 예 상되므로 대비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피고 그 에 더해서 교회가 동성애 문제에 대한 취해야할 대응전략을 몇 가지로 제시하려고 한다.

II. 성경에 나타난 동성애

A. 소돔성 사건: 창세기 19:1-13 동성애는 흔히 '소도미'라 불려왔다. 교회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소돔성 에 동성애 풍습이 퍼져있었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 했다고 가르쳐왔다. 창세기 19장에 기록된 사건은 소돔성 사람들은 그 성을 방문한 두 사람에게 동성애를 행하려고 했다고 이해해 왔기 때문이 다. 그러나 1955년 영국의 구약학자 베일리(Derrick Sherwin Bailey, 1910-1984)는 교회의 전통적 입장이 잘못된 해석에 근거한 것임을 주장 하는 책을 출판했다. 베일리는 여기서 말한 소돔인의 “악”(wickedness, 19:7)이란 소돔성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매우 무례히 대한것(inhospitality) 이었다고 주장하고, 교회가 이 본문을 동성애로 이해하고 정죄해 온 것은 주전 2세기 유대 외경들이 잘못 해석한 것을 채택하여 따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 베일리에 따르면 소돔 사람들이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19:5) 고 말하여 요구한 것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려고 한 것이었고, 그 이유는 본래 소돔 사람이 아닌 이주자인 롯의 집에 늦은 밤에 들어온 이 상한 타국인들(foreigners)을 수상히 여겼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상관”하다로 번역된 원어 “야다”(yadha)라는 단어가 지닌 통상적 의 미를 따른다면 이들의 악이란 무례의 악으로 보는 해석이 당연하고 자연 스럽다고 베일리는 주장한다. '야다'는 구약에 943번 나오는데 오직 12 번만 성적인 뉘앙스를 지닌 의미로 쓰였을 뿐 대부분이 그저 '알다'(to know), '친해지다'는 의미로 쓰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본문 에서도 그들을 수상히 여겨 좀 조사하려 했던 것으로 보는게 자연스럽다 는 것이다. 그러면 롯이 소돔 사람에게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고 말했을 때의 그 악이란 고대 근동 문화에서 자기 동네에 들어온 손님을 지극 히 환대해야 하는 관습을 무시하고 깨뜨린 잘못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 장한다. 이 해석을 뒷받침 하는 다른 근거로 베일리는 소돔의 죄악을 열 거하고 있는 다른 성경 본문들(겔16:49; 사1:10; 렘23:14)에서 동성애를 거론하고 있지 않음을 제시한다.

베일리의 주장은 이후 많은 학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왔지만 이에 대 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먼저 '야다'의 의미는 이 단어가 쓰인 문맥을 통 해 살펴보면 분명히 성적 뉘앙스를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기가 어렵다. 소돔 사람들이 두 사람을 '알려고'(yada) 그들을 이끌어 내어 달라고 롯에게 요구했을 때, 롯은 손 님 대신 남자를 “가까이 하지”(yada) 않은 자신의 두 딸을 그들에게 이끌어 내어 주겠 다고 제안했다. 이 때 롯은 자기 딸을 가리 켜 남자를 '야다' 즉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 말은 그 딸이 단순히 남자에 대한 지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갖은 적이 없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석해야 문맥상 자연스 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대화에서 쓰인 단어 '야다'는 분명히 성 적인 뉘앙스를 지닌 것이고, 그렇다면 소돔 사람이 손님들에게 동성애적 윤간을 하려 한 것임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5) 이것이 동성애 는 소돔인들의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간”(유다서 7절) 악들 가운 데 하나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이유이다.

B. 모세율법과 동성애: 레위기 18:22; 20:13 모세는 동성애에 관한 법을 두 번이나 가르쳤다: “누구든지 여자와동침함 같이(눕둣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레 18:;22);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 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례 20:13). 교회는 이 구절을 동성애 를 정죄하는 분명한 명령으로 이해해 왔다. 베일리 이후의 많은 학자들 가운데 이 구절이 동성애를 정죄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 지된 신전매춘(신23:17) 등의 우상 숭배와 관련된 종교적인 이유 때문으로 보면서 이것이 일반적 동성애에 대한 도덕적 정죄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신학자 객넌(Robert A.J.Gagnon)은 이 명령은 언약백성으로 서 거룩한 삶의 독특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주어진 율법임을 강조한다. 언약백성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닮고 좇아가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전의 애급사람들과 앞으로 들어갈 땅의 가나안인들의 가증한 성의 행습 을 따라서는 안되고 하나님이 만드신 성의 바른 질서에 따라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치는 맥락에서 명령된 성 규범이라는 것이다.6) 18장은 언약 백성이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성적인 삶에서 분명히 경계를 지켜야 함 을 가르치는데, 근친상간(6-18절)을 금하고, 간음(20절)그리고 수간(23 절)을 금지하는 20절과 23절 가운데 동성애 금지 명령(22절)을 넣고 있 다. 배우자와 비배우자의 경계 부모와 자식 간의 경계, 그리고 인간과 동 물의 경계를 넘어 성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명령은 하나님의 백성이 성결을 유지하 기 위해 지켜야 할 도덕법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 율법이 규범성 여부는 신약교회가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게되면 파악하게 된다.

C. 고린도전서 6:9-10 #@#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 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 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자 [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전 6:9-10)고 권고 했다. “탐색하는 자”의 헬라어 말라코이는 '여자같은', '말랑말랑한', '부 드러운'이란 뜻으로 사용되던 단어인데 이것은 당시 성행위 때 여성의 역 할을 하는 남성 동성애자를 의미했다. 그런데 “남색 하는 자”로 번역된 헬라어 '알세노코이타이'(Arsenokoitai)의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 하다. 그것은 이 단어가 당시 헬라어에 없었던 신조어였기 때문이다.

에서 쓰인 '남자'에 해당하는 알센(arsen)과 '동침'에 해 당하는 코이테(koite, 침대)를 결합한 합성어라는 것이 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죄로서 동성애를 의미하는 새 단어를 만들면서 그것을 동성애를 금지하는 레위기 율법의 구절에 쓰였던 단어들을 조합 하여 만들었다는 것은 바울이 레위기의 동성애 금지 율법을 신약 교회에 도 여전히 유효한 도덕적 규범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D. 로마서 1:18-27

이 본문은 동성애 행위에 관해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는데, 바울은 신 학적인 문맥 가운데서 동성애 행위의 성격을 규정한다. 바울은 로마서 1 장의 전반부에서 복음이 사람들에게 긴급히 필요함을 선언하고 후반부 에서는 그 이유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이방인들이 불의로 하나님의 진리 를 억압하는 그릇된 상태에서 우상을 섬기며 살면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당시 그리스 로마 사회의 이방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피조물들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고 있음 을 묘사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고의적 무지' 때문이라고 말한 다. 즉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자기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여 마음 을 틀어 막았다는 것이다.7) 하나님은 피조물들이 당신에 대한 지식을 가 질 수 있도록 당신의 신성과 존재를 그의 창조 세계에 분명히 드러내셨지만(1:19), 사람들은 자신의 불의함으로 그 진리를 알지만 그것을 억눌러 버렸는데(18절, 25절),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자기와 피조물을 섬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인류의 불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높이기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은 데 있다”(21절) 이 때문에 하나님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19절) 이들에게 “진노”하셔서 이들을 마음의 정욕(24),부끄러운 욕심(26), 상실한 마음(28절)에 “내어 버려” 두었다(24, 26, 28 절). 그러자 사람들은 그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자기들의 더 어두워진 마음(21절)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는데, 그 구체적인 모습이 성관계에서 질서를 바꾸어 동성애를 행하게 된 것이다(24-27).

바울의 신학적 설명은 곧 인간이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창조 주를 알되 섬기지 않고 도리어 자기 생각대로 피조물을 섬기는 '비정 상'과 '반자연'을 따르게 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결과로 사 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수평적 관계에서도 비정상과 반자연에 따라 살 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한 현상이 성적인 왜곡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9) 그런데 동성애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이 본문에 대해 다르게 해석한다. 즉 여기서 바울이 여기서 동성애 행위를 하는 자를 “역리”를 행하는 라 고 비판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이 이성애자의 성향을 지닌 사람으로서 그것에 역행하여 동성애를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바울 이 현재처럼 동성애 성향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는 의학적 지식이 있었다고 하면, 이런 사람의 동성애행위를 역리로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 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본문은 본래적 동성애자들의 동성애 행위에는 적용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10)

그러나 이런 주장은 본문의 문맥상 정당하지 않다. 바울이 여기서 “순 리” “역리”를 언급할 때 그것은 어떤 사람 개개인의 독특한 성향과 특성 의 차원에서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미 논의를 창조론 즉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자의 의도를 다룬 것으로부터 시작했고(18-19절),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반역하면서 자신의 불의로 하나님의 진리를 누르 고 그것을 거짓 것으로 바꾸어 우상을 숭배하며 살게 된 것을 설명하는 맥락 가운데에서 동성애를 역리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순리 즉 자연은 개인의 본성이 아니라 바로 창조의 질서를 가리키는 것 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동성끼리의 성행동을 역리를 따라 행한 것이라고 분명히 정죄한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바울이 오늘처럼 동성애 지향성에 대해 현대인들이 이 해하는 것과 같은 지식이 있었다면, 이 성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과 연 정죄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질문은 해 볼 가치는 있겠지만, 이 본문의 내용으로부터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없다. 굳이 해 보자면 바울은 그 성향 자체도 하나님의 유기로 인해 발생한 결과물의 하나로 보기 때 문에, 그 행위를 정당화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 도 순리 즉 자연에 순응한다는 그의 신학적 이해는 결코 달라지지 않았 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가르침을 정리한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하는 자 연과 정상의 삶을 버리자 하나님이 진노하여 내버려두신 결과 그에 따라 윤리적 삶에서도 자연과 정상을 버리게 되었음을 바울은 분명히 드러내 고 있다. 그 결과 성적 생활에서도 역리를 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 므로 바울은 여기서 역리를 창조의 질서를 반하는 것으로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동성애에 대해 신학적으로 설명해주는 바울의 가르침은 추호도 모호하지 않다. 신학자 판넨베르크(Wofgang Pannenberg) 교 수는 이 구절들을 읽고도 동성애 행위를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반하 는 것으로 보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 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만약 교회가 동성애를 승인하고 동성결혼을 이성결혼과 동일한 것으로 인정한다면 그 교회는 “더 이상,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가 아니다”고 단호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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